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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켄 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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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켄 천황은 아베라는 이름으로 태어났으며, 아버지 쇼무 천황과 어머니 고묘 황후 사이에서 태어났다. 738년 여성 황태자로 책봉되었으며, 749년 쇼무 천황의 양위로 즉위했다. 통치 초기에는 고묘 황후의 후원을 받았으나,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의 권력 확대와 다치바나노 나라마로의 난 등 정치적 격변을 겪었다. 758년 사촌인 준닌 천황에게 양위하고 상황으로 물러났으나, 764년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의 난을 계기로 준닌 천황을 폐위시키고 쇼토쿠 천황으로 다시 즉위했다. 이후 승려 도쿄를 총애하며 불교 정책을 강화했으나, 우사 하치만구 신탁 사건으로 도쿄의 권력이 약화되었다. 770년 사망했으며, 고닌 천황이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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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켄 천황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우타가와 쿠니사다 3세의 고켄 천황 (잘린 이미지)
고켄 천황 (우타가와 쿠니사다 3세 그림, 일부 편집)
호칭고켄 천황 (孝謙天皇)
쇼토쿠 천황 (称徳天皇)
일본식 시호다카노노히메노 스메라미코토 (高野姫天皇)
아베 (阿倍)
출생718년경
사망770년 8월 28일
능묘다카노 능 (高野陵) (나라)
종교불교
재위 정보
제46대 천황 (고켄 천황, 첫 번째 재위)749년 8월 19일 ~ 758년 9월 7일
선대쇼무 천황
후대준닌 천황
즉위 정보
고켄 천황 즉위749년 8월 19일
제48대 천황 (쇼토쿠 천황, 두 번째 재위)764년 11월 6일 ~ 770년 8월 28일
선대준닌 천황
후대고닌 천황
쇼토쿠 천황 즉위
즉위일765년 1월 26일
가계
아버지쇼무 천황
어머니후지와라노 아스카베히메
기타 정보
황실일본 황실

2. 약력

738년 1월 13일(양력 2월 6일), 쇼무 천황고묘 황후 사이의 딸인 아베 내친왕이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이는 일본 역사상 전무후무한 '여성 황태자' 책봉이었다.[1] 겐메이 천황 앞에서 오절무(五節舞)를 추었다는 기록이 있다.

749년 7월, 아버지 쇼무 천황의 양위로 고켄 천황이 즉위하였다. 초기에는 고묘 황태후의 후견을 받았으며, 황태후의 조카 후지와라노 나카마로가 시비츄다이(紫微中臺) 장관에 임명되면서 나카마로의 세력이 급속히 확대되었다.[8]

756년 쇼무 태상천황이 붕어하면서 니이타베(新田部) 친왕의 아들 후나도 왕(道祖王)을 황태자로 삼으라는 유조를 남겼으나, 757년 고켄 천황은 후나도 왕을 폐하고 도네리(舍人) 친왕의 아들로 나카마로의 후원을 받던 오오이 왕(大炊王)을 새 황태자로 삼았다. 이는 고켄 천황과 나카마로의 의향이 작용한 것으로 여겨진다.[21]

758년, 고켄 천황은 사촌인 준닌 천황에게 양위하였다. 고켄 천황의 재위 기간은 약 10년이었다.[12] 재위 기간은 덴표칸포, 덴표쇼호, 덴표호지 연호로 구분된다.[14]

덴표호지(天平寶字) 2년(758년) 8월 1일, 고켄 천황은 오오이왕에게 양위하고 물러났다. 후지와라노 나카마로는 '후지와라노 에미노 오시카쓰'라 칭하며 권세를 떨치게 되었다.

764년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의 난이 진압된 후, 고켄 천황은 쇼토쿠 천황으로 다시 즉위하였다.[10] 765년 1월 26일 (天平宝字|덴표호지일본어 9년 1월 1일)에 쇼토쿠 천황으로 공식 즉위하였다.[10]

이후 770년 8월 4일 (神護景雲|진고케이운일본어 4년 8월 4일) 57세의 나이로 승하하여 5년간의 통치를 끝내고 황위는 공석이 되었다.[12]

2. 1. 황태자 시절

쇼무 천황과 고묘 황후 사이에는 아들이 없었다. 유일한 아들이었던 모토이왕(基王)도 요절하면서 슬하에 딸인 아베 내친왕만이 있었고, 후궁인 아가타노이누카이노 히로토지(県犬養広刀自) 사이에 아사카 친왕이 있었지만 후견 세력이 없어 즉위할 가망이 없었다. 덴표 10년(738년 1월 13일(양력 2월 6일)에 아베 내친왕이 일본 역사상 전무후무한 '여성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덴표 14년(738년) 5월 5일에는 겐메이 천황 앞에서 오절무(五節舞)를 추어보였다는 기록이 있으며,[1] 덴표 17년(744년)에 아사카 친왕이 죽은 뒤 쇼무 천황의 유일한 자식으로 남게 되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쇼무 천황이 쓰러져 중태에 빠졌을 때, 다치바나노 나라마로가 "황사(皇嗣)가 서있지 않다"며 키부미왕(黃文王)을 옹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당시 여제는 모두 독신(미혼이나 미망인)이었던 데다 아베 내친왕이 즉위한다 해도 다음 황위를 누가 이을 것인가에 대한 전망도 서지 않았고, 그녀를 대신할 다른 천황 후보를 요구하는 움직임이 그녀가 붕어한 뒤에까지 계속되었다.

2. 2. 고켄 천황 즉위와 치세

덴표쇼호(天平勝寶) 원년(749년) 7월, 아버지 쇼무 천황이 양위하여 고켄 천황이 즉위하였다. 초기에는 고묘 황태후의 후견을 받았는데, 황태후를 위해 시비츄다이(紫微中臺)가 설치되고 그 장관으로 황태후의 조카 후지와라노 나카마로가 임명되면서 나카마로의 세력이 급속히 확대되었다.[8]

756년 5월 2일, 아버지 쇼무 태상천황이 붕어하면서 니이타베(新田部) 친왕의 아들 후나도 왕(道祖王)을 황태자로 삼으라는 유조를 남겼다. 그러나 이듬해(757년) 3월, 고켄 천황은 후나도 왕의 행실이 황태자로서 어울리지 않는다 하여 폐하고, 대신 도네리(舍人) 친왕의 아들로 나카마로의 후원을 받고 있던 오오이 왕(大炊王)을 새로운 황태자로 삼았다. 이는 고켄 천황과 나카마로의 의향이 작용한 것으로 여겨진다.[21]

나카마로의 권세가 날로 강해지자, 다치바나노 나라마로나 오오토모노 고마로(大伴古麻呂) 등은 고켄 천황을 폐하고 새로운 천황을 옹립하려는 쿠데타를 계획했으나, 사전에 누설되어 실패하였다. (다치바나노 나라마로의 난)[9]

758년, 고켄 천황은 사촌인 준닌 천황에게 양위하였다. 고켄 천황의 재위 기간은 약 10년이었다.[12]

고켄 천황의 재위 기간은 다음과 같은 연호로 구체적으로 구분된다.[14]

연호기간
덴표칸포749년
덴표쇼호749년–757년
덴표호지757년–765년


2. 2. 1. 다치바나노 나라마로의 난

6월 28일(양력 7월 22일), 야마베 왕(山背王)이 고켄 천황에게 "다치바나노 나라마로가 군사를 일으켜 후지와라노 나카마로를 제거하려 한다"고 밀고했다.[16] 그러나 고켄 천황은 나흘 뒤인 7월 2일(양력 7월 26일), 태후와 함께 "모반 소문이 있지만 모두 조정을 따르라"는 조칙을 내렸다. 그날 밤, 카미츠미치노 아야타로(上道斐太郞)가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에게 "오노노 아즈마히토가 모반에 가담할 것을 권유했다"고 밀고했다. 이에 나카마로는 군사를 동원해 후나도 왕의 저택을 포위하고 아즈마히토 등을 체포했다.

다음날, 후지와라노 도요나리와 후지와라노 나가테 등이 아즈마히토 등을 심문했다. 고켄 천황은 "모반 계획을 믿지 않는다"는 선명을 내렸지만, 아즈마히토는 태도를 바꿔 모반 계획을 털어놓았다. 모반 계획은 다치바나노 나라마로, 오토모노 고마로, 아스카베 왕, 기부미 왕 등이 군사를 일으켜 나카마로와 오오이 왕을 제거하고, 태후에게서 역령(驛鈴)과 옥새를 빼앗은 뒤, 후지와라노 도요나리를 받들어 천황을 새로 추대한다는 것이었다.

7월 4일(양력 7월 28일), 다치바나노 나라마로, 후나도 왕, 기부미 왕, 오오토모노 고마로, 타지히노 코시카이(多冶比犢養), 가모노 쓰노타리(賀茂角足) 등이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고 모반 사실을 인정했다. 후나도 왕, 기부미 왕, 고마로, 아즈마히토, 코시카이, 쓰노타리 등은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고, 나라마로도 이때 사망했다. 살아남은 아스카베 왕과 오오토모노 고자비는 유배되었다가 사면되었고, 시오야키 왕은 황적에서 박탈되었다. 이 사건으로 443명의 관인이 처벌받았다. 후지와라노 도요나리도 좌천되었으나, 정적을 제거한 나카마로의 권세는 더욱 강해졌다.[16]

2. 3. 상황 시절

덴표호지(天平寶字) 2년(758년) 8월 1일, 고켄 천황은 병든 고묘 황후를 모시기 위해 오오이왕에게 양위하고 물러났다. 이날 고켄 천황에게는 '보자칭덕효겸황제(寶字稱德孝謙皇帝)'라는 존호가 내려졌다. 후지와라노 나카마로도 '후지와라노 에미노 아손(藤原惠美朝臣)'이라는 가바네(姓)와 '오시카쓰(押勝)'라는 이름을 받아 '후지와라노 에미노 오시카쓰'라 칭하게 되었고, 주요 관청 및 관직의 이름을 당나라 풍으로 바꾸는 등 더욱 권세를 떨치게 되었다.

고켄 천황은 양위한 뒤에도 덴표호지 연호를 바꾸는 것을 끝내 거절했고, 준닌 천황의 생부(도네리 친왕)와 생모에게 천황이나 황후 추존을 하는 것도 반대했다. 덴표호지 3년(759년), 고묘 황태후가 준닌 천황의 친아버지인 도네리 친왕에게 존호를 줄 것을 제안했는데, 이를 상담하러 온 천황에게 고켄 상황은 황태후에게 사퇴를 권고하도록 조언하였다. 그러나 결국 황태후의 거듭된 설득으로 도네리 친왕에게 '숭도진경황제(崇道尽敬皇帝)'라는 존호를 주게 되었는데, 이는 고켄 상황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분명히 보여주었다.

덴표호지 4년(760년) 7월 16일, 고묘 황태후가 붕어하면서 고켄 상황과 나카마로, 준닌 천황의 관계는 미묘해졌다. 8월에 고켄 상황과 준닌 천황은 오하리다노미야(小治田宮)로 옮겼다가 덴표호지 5년(761년)에는 호라노미야(保良宮)로 옮겼다. 여기서 병을 얻게 된 고켄 상황은 간병을 맡았던 유게씨 출신의 승려 도쿄(道鏡)를 총애하게 되었다. 덴표호지 6년(762년) 5월 23일(양력 6월 23일), 준닌 천황은 헤이조쿄로 돌아갔지만, 고켄 상황은 헤이조쿄로 돌아가지 않고 호케지(法華寺)에 머물렀다. 이때 《속일본기》는 "고켄 천황과 준닌 천황 사이에 틈이 생겼다"고 기록했는데, 고켄 상황과 준닌 천황, 나카마로의 불화가 표면으로 드러난 것이다. 6월 3일, 고켄 상황은 5위 이상의 관인을 불러 준닌 천황의 불효를 언급하며 자신은 불문에 들어 별거할 것을 표명하고, 나아가 "천황은 항례의 제사 같은 사소한 일이나 맡으라. 국가의 대사와 상벌은 짐이 맡을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이 불화의 원인으로는 도쿄를 배제하려는 준닌 천황과 나카마로의 움직임, 자신이 쇼무 천황의 적녀이자 황통의 정통 계승자라는 의식을 갖고 있던 고켄 상황이 준닌 천황에게 불만을 품게 된 것 등이 거론된다. 이러한 대립은 덴표호지 7년(763년)부터 8년(764년)까지 도쿄나 기비노 마키비 등 고켄 상황파가 요직을 맡고 나카마로의 아들들은 군사 요직을 차지하는 등, 고켄 상황과 준닌 천황, 나카마로 간의 세력 다툼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계속되었다.

2. 4.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의 난

덴표호지 8년(764년) 9월 11일,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의 군사 동향을 파악한 고켄 상황은 야마무라왕을 시켜 천황이 가지고 있던 군사 지휘권의 상징인 영인(鈴印)을 회수하게 했다.[9] 나카마로 측은 이를 탈환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영인은 상황의 손에 넘어갔다. 이로써 나카마로는 조적(朝敵)으로 몰리게 되었다. 나카마로는 태정관인(太政官印)을 탈취해 오미 국으로 도주했지만, 9월 13일에 살해되었다.

나카마로가 패사하였다는 통지가 도착한 9월 14일, 고켄 상황은 이전에 나카마로에 의해 좌천되었던 후지와라노 도요나리를 우대신(右大臣)으로 삼았다. 6일 뒤인 20일에는 도쿄를 대신선사(大臣禪師)로 삼았다. 22일에는 나카마로가 당풍으로 바꾸었던 관직과 관청의 이름을 모두 예전의 것으로 되돌렸다. 10월 9일에는 준닌 천황을 폐하여 오오이 친왕으로 삼았다가 아와지노기미(淡路公)에 봉하여 유배함으로써, 준닌 천황은 폐위되었다.

2. 5. 쇼토쿠 천황으로 복위

우사 신궁 남문


764년 준닌 천황이 폐위되자, 고켄 천황은 쇼토쿠 천황으로 다시 즉위하였다.[10] 765년 1월 26일 (天平宝字|덴표호지일본어 9년 1월 1일)에 쇼토쿠 천황으로 공식 즉위하였다.[10]

쇼토쿠 천황의 치세는 혼란스러웠는데, 다치바나노 나라마로와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의 쿠데타 시도를 모두 극복해야 했다.[16] 쇼토쿠 천황은 불교 승려 도쿄에게 작위와 권력을 부여하며 총애했다.[17]

이후 쇼토쿠 천황은 770년 8월 28일 (神護景雲|진고케이운일본어 4년 8월 4일) 57세의 나이로 승하하여 5년간의 통치를 끝내고 황위는 공석이 되었다.[12]

2. 5. 1. 우사 하치만구 신탁 사건

이 무렵, 다자이후의 책임자였던 유게노 키요히토와 칸즈카사(主神) 나카토미노 스게노 아소마로(中臣習宜阿曾麻呂)가 "도쿄를 황위에 앉히면 천하가 태평해질 것이다"라는 우사 하치만구의 신탁을 알렸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와케노 히로무시(和氣廣蟲)의 남동생인 와케노 키요마로가 칙사로서 우사하치만구에 보내졌다. 8월에 우사하치만구에 참배하고 보물을 바친 뒤 선명의 문장을 읽으려는 기요마로 앞에, 신이 신관 카라시마노 스구리요소메(辛嶋勝與曾女)에게 내려 선명을 선포하기를 거부했다고 한다. 이에 의심을 품은 기요마로는 재차 스구리요소메에게 선명을 청했고, 스구리요소메가 다시 신에게 현신을 청하자 키가 석 장(대략 9m)이나 되는 승려의 모습을 한 하치만신이 기요마로 앞에 모습을 드러내어 재차 선명을 내리기를 거절했고, 기요마로는 이를 "하늘로부터 이어진 천황가의 자리는 반드시 미카도의 일족에게만 잇게 하라는 계시다!"라는 대신의 신탁을 갖고 돌아가 아뢴 다음 "앞서의 신탁은 허위"라고 복명했다.[17] 노한 쇼토쿠 천황과 도쿄는 기요마로의 이름을 강제로 고치게 한 다음 이나바노곤노스케(因幡員外介)로서 좌천시켰다가 다시 이름을 '와케베노 케가레마로(別部穢麻呂)'로 강제로 바꾸게 한 뒤 오스미(大隅) 국에 유배해버렸다(우사하치만구 신탁사건). 비구니였던 기요마로의 누나 히로무시도 강제로 환속당하고 '와케베노 히로무시메(別部廣虫賣)'라고 이름이 고쳐진 채 빈고(備後)로 유배되었다.

2. 6. 죽음과 계승

770년 8월 4일, 쇼토쿠 여제는 헤이조쿄 서궁의 침전에서 숨을 거두었다. 향년 52세였으며, 사인은 천연두로 알려져 있다.[51] 병 회복을 기원하는 기도를 했다는 기록이 없어, 의도적으로 의료 행위를 하지 않고 죽음을 방치했다는 주장도 있으며,[51] 심지어 암살설까지 제기되기도 한다. 쇼토쿠 여제는 5년 동안 통치하였다.[12]

쇼토쿠 여제는 평생 독신으로 지내 자식이 없었다. 여제 사후, 군신들은 후계자를 논의하였는데, 기비노 마키비덴무 천황의 손자인 훈야노 오오치나 훈야노 기요미를 추천했다. 그러나 후지와라노 나가테, 후지와라노 스쿠나마로, 후지와라노 모모카와는 주나곤 시라카베 왕을 추천했다. 마키비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자, 나가테 등은 시라카베 왕을 후계자로 지명한 쇼토쿠 여제의 유조를 제시했고, 결국 시라카베 왕이 즉위했다. 오늘날 이 유조는 위조된 것으로 여겨진다.

도쿄는 곧바로 실각하여 시모쓰케국 야쿠시지 별당으로 좌천되었고, 기요히토 역시 도사국으로 유배되었다.

3. 강제 개명

효겸천황(孝謙天皇)은 자신에게 반항한 자에게 종종 비천한 이름을 붙이는 행위를 했다.

도경(道鏡)이 건립한 서대사(西大寺)에 전해지는 효겸천황(孝謙天皇)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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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의 예가 있다.

4. 한국과의 관계

752년 윤3월, 신라의 왕자를 자처한 한아찬(韓阿飡) 관등의 김태렴(金泰廉)이라는 자와 공조사(貢調使) 김훤(金暄), 왕자를 모시는 김필언(金弼言) 등 700여 명의 신라인들이 일곱 척의 배를 타고 와서 다자이후에 정박하였다. 이들은 6월 14일에 수도로 들어와 신라 왕의 사명을 받들고 왔다고 알리면서 인사를 올리고 예물을 올렸는데, "하늘 아래 모든 땅이 천황의 땅이 아닌 것 없고, 하늘 아래 모든 백성이 천황의 백성이 아닌 자가 없습니다."라며 절하는 김태렴 일행에게 일본 조정은 사흘 뒤인 17일에 이들을 조당(朝堂)으로 초청해 잔치를 열어주었다. 여기서 여제는 "신라는 먼 옛날부터 대일본국에 조공을 바쳐 왔는데, 전왕인 승경(承慶, 효성왕) 때 신라의 대부(大夫)인 김사공(金思恭) 등의 언행이 태만하여 예를 잃었으므로, 짐이 따로 사신을 보내 죄를 묻고자 하다가 지금 새로 신라 왕이 된 헌영(軒英, 경덕왕)이 그 잘못을 알고 왕자를 보내어 예를 닦으니, 앞으로는 국왕이 친히 못 오겠거든 반드시 표문을 가지고 오도록 하라."고 말했다. 김태렴 등은 6월 22일에 다이안사(大安寺)와 도다이사(東大寺)에 나아가 예불을 드리기도 했으며, 24일에는 나니와(難波)관(難波館)에 머무르면서 사신을 보내 일본 조정에 예물과 술을 보냈다. 이듬해인 753년에 여제는 오노노 다모리(小野田守)를 신라에 사신으로 파견했지만, 경덕왕이 오노노 다모리를 만나주지도 않아 돌아와야 했다. 이 사건은 일본에 대한 신라의 태도, 신라의 일본관(觀)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건으로 꼽힌다. 김태렴이 스스로 신라 왕의 아들이라고 자처한 것과는 달리 경덕왕에게는 원래 왕자가 없었으며, 김태렴은 거짓으로 신라 왕자나 대아찬 등의 관등을 사칭하여 일본 땅에 와서 그들이 가지고 온 물건을 팔려는 데에 목적이 있었고, 일본 조정은 이러한 김태렴의 거짓말에 속아넘어갔다는 것이다.

한편 《속일본기》에 따르면 일본 사신 오오토모노 고마로(大伴古麻呂)는 753년 정월에 당나라 조정에서 열린 조하식전에서 여러 나라의 사신들과 함께 현종을 만났는데, 이때 고마로의 자리는 토번(티베트) 사신과 함께 서반 제2석에 있었고, 신라 사신은 대식국(페르시아) 사신과 함께 동반의 제1석에 있었다. 고마로는 일본보다 상석에 신라가 위치한 것을 보고 신라는 예로부터 일본의 조공국이라며 시정을 요구하며 항의하였다. 이에 장군 오회실이 고마로의 눈치를 보며 신라 사신과 일본 사신의 자리를 서로 바꾸게 했다고 한다.[52] 하지만 이 사건은 《속일본기》 이외에 중국과 한국의 사료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53] 그리고 이 해에 신라 사신은 조하식전에 참석하지 않았으며, 대식국과 토번은 입당하지 않았다. 결국 고마로 기사는 《속일본기》의 편찬자에 의하여 조작되거나 윤색된 것으로 추정된다.[54]

5. 계보

고켄 천황은 쇼무 천황고묘 황후(후지와라노 아스카베히메) 사이에서 태어난 두 번째 딸로, 아베 내친왕으로 알려져 있다. 남동생이 있었으나 성인이 되기 전에 사망했다. 고켄 천황은 결혼하지 않았고 자녀는 없었다.[19]

관계이름
아버지쇼무 천황
어머니고묘 황후
동모제모토 왕


6. 연호

고켄 천황의 재위 기간은 다음과 같은 연호들로 구분된다.[14]



쇼토쿠 천황의 재위 기간은 다음과 같은 연호들로 구분된다.[15]

  • '''덴표호지''' (757년–765년)
  • '''덴표징고''' (765년–767년)
  • '''징고케이운''' (767년–770년)


고켄 천황, 준닌 천황, 쇼토쿠 천황의 재위기에는 일본 역사상 4글자의 연호가 유일하게 연속적으로 사용되었으며, 이 시기를 “4글자 연호 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4글자 연호가 도입된 것은 여성인 고켄 천황의 즉위에 즈음하여, 무주(武周)의 여제인 무측천이 4글자 연호(천책만세, 만세등봉, 만세통천의 3가지)를 사용한 예에 따랐다는 지적이 있다.[49]

연호기간
덴표쇼호749년 7월 2일(8월 19일) - 757년 8월 18일(9월 6일)
덴표호지757년 8월 18일(9월 6일) - 765년 1월 7일(2월 1일)
덴표징고765년 1월 7일(2월 1일) - 767년 8월 16일(9월 13일)
징고케이운767년 8월 16일(9월 13일) - 770년 10월 1일(10월 23일)


7. 능묘

궁내청은 나라현 나라시에 있는 다카노 황릉(高野陵, Takano no Misasagi)을 고켄 천황의 으로 지정하고 있다.[1] 이 장소는 일반인에게 공개되어 있다.[5][6]

쇼토쿠 천황 다카노노미사사기
(나라현 나라시)


(みささぎ)은 궁내청에 의해 나라현 나라시 산령정에 있는 '''다카노노미사사기'''(たかののみささぎ)에 지정되어 있다.[46][47][48] 궁내청상의 형식은 전방후원이다. 유적명은 「사키 다카쓰카 고분」으로, 분구장 127m의 전방후원분이다.

그러나, 본 고분은 사키 준레쓰 고분군을 구성하는 전방후원분이며, 그 비정은 의문시되고 있다.

또한 황궁에서는, 황령전(궁중삼전 중 하나)에서 다른 역대 천황·황족과 함께 천황의 령이 봉안되어 있다.

참조

[1] 문서 Emperor Kōnin, Takano Imperial Mausoleum Imperial Household Agency
[2] 서적 The Imperial House of Japan 1959
[3] 문서 Brown and Ishida
[4] 문서 Brown and Ishida
[5] 웹사이트 Shōtoku's misasagi – image https://web.archive.[...] 2008-01-07
[6] 웹사이트 Shōtoku's misasagi – map (top left) http://narashikanko.[...]
[7] 웹사이트 NengoCalc http://web.me.com/me[...]
[8] 문서 Brown and Ishida
[9] 논문 The Suppression of the Tachibana Naramaro Conspiracy https://www.jstor.or[...] 2009
[10] 문서 Brown and Ishida
[11] 문서 Brown and Ishida
[12] 문서 Brown and Ishida
[13] 논문 The Hachiman Cult and the Dōkyō Incident 1979
[14] 서적
[15] 서적
[16] 논문 The Suppression of the Tachibana Naramaro Conspiracy https://www.jstor.or[...] 2009
[17] 서적
[18] 뉴스 Life in the Cloudy Imperial Fishbowl http://search.japant[...] Japan Times 2007-03-27
[19] 웹사이트 Genealogy https://reichsarchiv[...] 2010-04-30
[20] 논문 名代について https://hdl.handle.n[...] 京都女子大学史学会 2014-02
[21] 서적
[22] 서적
[23] 논문 『続日本紀』天平宝字二年八月庚子朔条「上臺」考
[24] 논문 孝謙太上天皇と「皇帝」尊号
[25] 서적
[26] 서적
[27] 논문 奈良時代の大臣任官と宣命 2018
[28] 서적
[29] 논문 私の仲麻呂像 -反逆者像の払拭と政治観- 和泉書房 2021
[30] 서적
[31] 서적
[32] 논문 私の仲麻呂像 -反逆者像の払拭と政治観- 和泉書房 2021
[33] 논문 私の仲麻呂像 -反逆者像の払拭と政治観- 和泉書房 2021
[34] 서적
[35] 논문 私の仲麻呂像 -反逆者像の払拭と政治観- 和泉書房 2021
[36] 서적 渡辺
[37] 서적 院政とは何だったか PHP新書 2013
[38] 서적 渡辺
[39] 서적 渡辺
[40] 서적 渡辺
[41] 논문 称徳王権論 八木書店 2023
[42] 웹사이트 https://www.sankei.c[...]
[43] 서적 渡辺
[44] 서적 渡辺
[45] 논문 称徳王権論 八木書店 2023
[46] 웹사이트 天皇陵 https://www.kunaicho[...]
[47] 서적 陵墓要覧 宮内省諸陵寮編 1934
[48] 서적 陵墓地形図集成 縮小版 宮内庁書陵部陵墓課編、学生社 2014
[49] 간행물 なぜ奈良時代には四文字の元号があるのか? 岡山県立図書館
[50] 문서 기비노 마키비의 여동생이라고 하나 그의 딸이라는 설도 있다.
[51] 문서 기도는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미신이지만 당시에는 훌륭한 의료 행위의 하나였고, 당시의 인간의 주관에서는 기도를 실시하지 않는다는 것은 의료 행위를 하지 않고 죽게 내버려 두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52] 문서 副使大伴宿禰古麻呂自唐國至。古麻呂奏曰。大唐天寶十二載。歳在癸巳正月朔癸卯。百官諸蕃朝賀。天子於蓬莱宮含元殿受朝。▽是日。以我次西畔第二吐蕃下。以新羅使次東畔第一大食國上。古麻呂論曰。自古至今。新羅之朝貢大日本國久矣。而今列東畔上。我反在其下。義不合得。時将軍呉懐實見知古麻呂不肯色。即引新羅使。次西畔第二吐蕃下。以日本使次東畔第一大食國上。(『続日本紀』天平勝宝6年正月丙寅条)
[53] 웹인용 〈SBS스페셜〉 ② 신라가 일본 조공국? 거짓된 역사 http://news.sbs.co.k[...] 2010-08-30
[54] 저널인용 당대 외국사의 쟁장사례에서 본 고마여항의의 재론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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